2014년 8월. 아이들 여름방학이 되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을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올해도 어딘가 가긴 가야 할텐데, 어디를 가야 하나. TV에 캠핑 관련 방송이 나온다. 아이들과 와이프가 우리도 가자고 한다. 요새 유행이라는 것이다. 그까잇 캠핑이 뭐가 좋다고. 한데 나가서 가서 고생만 하지. 나는 별 관심 없이 흘려 들었다.
며칠을 못 정하고 어영부영 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인터넷으로 글램핑을 예약했다고 했다. 글램핑? 그게 뭐야? 먹는 거임? 캠핑의 일종인데 아무 준비 없이 몸만 가면 된다고 한다. 예약하는데 15만원을 줬다고도 했다. 헉. 캠핑을 하는데 돈을 내다니. 그것도 15만원 씩이나. 무슨, 호텔도 아니고. 그렇지만, 방학때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하고, 15만원은 이미 내 버렸다네. 전혀 예상치도 않았고 달갑지도 않았던 글램핑을 가게 되었다. 가야지 어쩔 수 있나. 기왕에 가는 거, 재미있게 놀다 오자.
글램핑
처음 가보는 글램핑. 어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 가보는 캠핑이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레지도 않았다. 그 날따라 비가 왔고, 여름치고는 날씨도 추웠다. 캠핑장 앞 개울에서 비를 맞으며 물놀이를 했지만, 추워서 잠깐 하고 말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잠시 쉬다가, 직원이 마련해 준 장작불을 피우고, 직원이 마련해 준 고기를 구웠다. 준비도 남이 다 해주고, 글램핑이 좋긴 좋구만.
고기는 역시 숯불에 구워야 제 맛. 소주 한 잔 곁들이니 세상 좋네. 밤은 적당히 어둡고. 시골이라 별도 많이,,, 음, 별은 구름때문에 안보이는구나. 살짝 아쉽네. 그래도 기분 좋구나. 아이들과 준비해간 불꽃놀이를 하고 오니 장작불이 거의 꺼져간다. 관리실에 가서 장작을 샀다. 만원. 흠. 좀 비싸네. 그래도 기분 좋으니까 봐준다.
꺼져가는 불에 장작을 넣고 부채질을 하니 불이 다시 살아난다. 우물 정자로 장작을 쌓으니 조금 지나서 불길이 하늘 높이 솟는다. 부른 배를 감싸고 의자에 앉아 따뜻한 불을 쬔다. 멍하니 한동안 지나니 불길이 서서히 잦아든다. 장작 몇 개 더 넣으니 이내 다시 타오른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 불은 추억을 부른다. 어릴적 부엌 아궁이에서 불 피우던 추억. 곱은 손을 비벼대며 불 쬐던 추억. 추억은 술을 부르고, 술은 취기를 부른다. 기분좋게 적당히 몽롱하고 따시고 나른하다. 나만의 휴식. 힐링 타임. 그 시간, 그 경험, 그 느낌은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졌고, 마약처럼 단 한번에 나를 중독시켰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캠핑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했다.
불은 다 꺼져갔고 취기도 오를만큼 올라서 텐트에 자러 들어갔다. 그런데 여름이라고 방심했던가보다. 잠자리가 너무 추웠다. 자다가 추워서 몇번을 깼는지 모른다. 대학교 여름방학때 친구들과 지리산에 갔었다. 그 때도 텐트 안에서 자는데 이렇게 추웠었다. 역시 캠핑은 추워서 별로야. 불멍의 황홀했던 경험은 추위에 얼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설친 잠에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깨웠다. 라면을 끓여 아침을 준비하고 식구들을 깨웠다. 물어보니 와이프도 밤새 추위에 떨었다고 했다. 앞으로 캠핑은 안가겠단다. 아이들에게도 물어보니, 자기들은 잘 잤단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여름방학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꿈같던 10분의 낮잠
몇 달 후, 11월 어느 일요일. 너무 좋은 날씨 덕에 전혀 춥지 않은 날이었다. 교외로 놀러 갔다가, 음식점 앞에 비치 체어가 늘어서 있는 곳을 보았다. 맥주를 한 병 사서 비치 체어에 누웠다. 나른한 몸에 따뜻한 햇볕을 쬐며 저절로 잠에 빠졌다.
잠든 시간은 10여분 밖에 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10분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이었다.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 없었고, 세상만사를 다 잊고 있었던, 오롯이 무아지경에 빠져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캠핑에서 불멍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다시 한 번 캠핑을 가 보자. 캠핑 가서 불멍 하고 힐링 받자.
어릴 적 캠핑의 추억
어렸을 적에 여름에 놀러 간다는 것은 당연히 강가에 텐트를 치고 자고 오는 것이었다. 강에서 아이들은 멱을 감으며 놀았다. 어른들은 족대나 어항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잡은 물고기는 끓이거나 튀겨서 먹었다.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다. 요즘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때는 그랬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전국적으로 캠핑이 유행이어서, 학교에서 단체로도 캠핑을 많이 갔다. 가까이는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거나, 멀리는 오대산까지도 갔다. 한 번은 학교에서 단체로 캠핑을 갔었다. 밤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새벽에 급하게 텐트를 걷었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강물이 그 사이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지휘하에 친구들과 손을 잡고 불어난 강물을 헤치고 건넜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9시 뉴스에 나올법한 이야기이지만, 그 때는 그저 재미난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 캠핑의 유행은 점점 사그러졌고, 내 인생에서 캠핑을 가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그랬던 캠핑이 요새 다시 유행이다. 다시 시작된 유행, 어렸을 적 즐거웠던 추억, 불멍의 기억, 무아지경의 기억이 어우러져 나는 다시 캠핑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차박 캠핑
다시 시작하는 캠핑. 캠핑에는 장비가 필요하다. 캠핑은 자고 오는 것이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잠자리이다.
내 차는 미니밴이다. 2열 의자를 떼어내고 3열 의자를 바닥으로 숨기면 광활한 짐칸이 나타난다. 내부 폭을 재 보니, 긴 곳은 165cm, 짧은 곳은 120cm 이다. 길이는 250cm 이다. 이 정도면 안에서 3명은 잘 수 있을 것 같다. 와이프는 한데서 자는 것이 싫어서 캠핑은 절대로 안가겠다고 했다. 그러니, 나와 아이들 둘 잘 공간은 된다. 텐트는 안사도 되겠다. 대신에 울퉁불퉁한 짐칸을 메꿀 발포 매트를 5개 샀다. 침낭도 필요 없다. 집에 있는 이불을 가져가면 된다. 요즘은 사이트마다 전기가 들어온다네. 난방은 집에 있는 전기장판으로 하면 되겠다. 글램핑때 보다 따뜻하게 자겠네.
2열 의자를 떼어내어 바깥에 놓으면 훌륭한 쇼파가 된다. 의자도 안사도 되겠다. 그런데, 차 의자는 너무 무겁다. 가볍게 옮겨다니며 쓸 생각으로 낚시 의자를 세 개 샀다.
나처럼 차에서 자는 걸 차박이라고 하는데, 고수들은 도킹텐트란걸 사서 차랑 연결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그런거 하나 사야겠다. 도킹 텐트 안에서 요리하고 밥도 먹고 노는 공간으로 쓰는 용도다. 큰맘 먹고 31만원짜리 도킹텐트를 질렀다. 콜맨이라고, 제법 알아주는 상표였다. 1년 넘게 쓰다가 번거로워서 중고로 팔았다.
차박 캠핑은 비 오는 날 그 진가가 발휘된다. 밖에 비가 아무리 세차게 내려도 차 안으로는 물 한방울 새지 않기 때문이다. 바닥 공사를 할 필요도 없다. 부슬부슬 비오는 날, 트렁크 문을 열어 놓고 전기장판 켜놓아서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타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 좋은 힐링이 없다. 지금도 비오는 날에는 항상 차박이 생각난다.
캠핑 장비 마련
잠자리는 마련 되었고. 다음은 무엇을 사야 할까?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 캠핑 리뷰도 보고, 도서관에 가서 캠핑 책도 여러권 찾아 보았다. 오토 캠핑이 유행하면서, 예전에 비해 장비가 더 커지고 좋아지고 다양해졌다. 첫 캠핑이니 꼭 필요해 보이는 것만 사고, 나머지는 천천히 장만해도 된다.
캠핑의 꽃, 불을 피워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보니, 화로대도 종류가 많다. 그런 것을 그런 돈 주고 산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본가나 처가에 가면 고기를 종종 구워 먹었다. 그럴 때 쓰는 화로대는 깡통을 잘라 만든 것이었다. 한 번 쓰면 새카매지는 물건을 돈 주고 사다니. 나, 공대 나온 남자다. 필요한 것은 직접 만들어 쓴다.
어렸을 때 집에는 아궁이가 있었다. 커서는 본가나 처가에서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래서 불은 좀 피워 봤다. 내가 불 좀 피워봐서 아는데, 제일 간단하고 좋은 구조는 드럼통이나 기름 깡통같은 것이다. 원통형의 폐쇄된 공간 안에서 나무가 타기 때문에 열기가 쓸데없이 흩어지지 않는다. 통 아래 구멍을 뚫어 놓으면 저절로 산소가 공급된다. 불타는 공간보다 높게 벽이 있기 때문에 굴뚝 역할을 해서 적은 나무로도 불꽃이 잘 오른다.
나무를 때는 최고 효율의 구조는 로켓스토브와 나무가스스토브 이다. 구조는 로켓스토브가 더 단순하다. 쉽게 생각해서, 깡통 아래에 구멍을 뚫고 주변을 흙이나 재같은 단열재로 둘러싸면 로켓스토브와 비슷한 구조가 된다. en.wikipedia.org/wiki/Rocket_stove
Rocket stove - Wikipedia
A small manufactured rocket cooking stove Construction base of a rocket stove (L-tube) DIY - Timelapse. Rocket stove Type: L-Tube Rocket stove Type: L-Tube Rocket stove illustration A rocket stove is an efficient and hot burning stove using small-diameter
en.wikipedia.org
인터넷을 찾아보니, 페인트통이 이와 제일 비슷하다. 공캔 15L로 검색하면 나온다. 가격도 싸다. 지금은 조금 올랐네. 이걸 사서, 밑에서 5cm쯤 위에 공기 구멍을 뚫었다. 안에는 철망을 구겨 넣었다. 철망 때문에 장작은 공기구멍 위에 있게 된다. 불을 붙일 때는 구멍에 토치를 넣고 붙인다. 타고 남은 재는 철망 아래로 떨어진다. 재를 치울 때는 그냥 통째로 들고가서 쏟아 버리면 끝. 손잡이가 달려있어 들고 옮기기도 쉽다. 단 한가지 단점은 접을 수 없어서 부피가 크다는 것인데, 다른 짐을 통안에 넣어서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면 단점도 상쇄된다.
조명은 집에 있는 보조배터리에 LED를 달아서 만들었다. 옷걸이를 펴서 받침대도 만들었다.
그 외에, 고기 구울 석쇠는 하나에 500원짜리를 20개 샀다. 한 번 쓰고 버리면 그만이다. 가스버너, 부탄가스, 스텐 밥그릇 몇 개, 불집게 등 만들 수 없는 것들도 샀다. 20만원 안짝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겨울 내내 인터넷이랑 도서관에서 캠핑 관련 글만 읽었다. 하나 하나 사들이고 만들어서 웬만큼 다 마련했다. 이제 가는 일만 남았다.
아이들과의 첫 캠핑
3월. 아직 추운 날씨였지만, 빨리 가고 싶어 미치겠다. 회사 사람에게 추천받은 캠핑장을 예약했다. 마침 고향 근처에 있는 캠핑장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캠핑날 캠핑장에서 만나자고 미리 약속했다.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기 전날, 아이들과 마트에 갔다. 각자 캠핑 가서 먹고 싶은거 고르기. 나는 물론 술과 고기를 잔뜩 샀다. 짐도 미리 실어놓았다.
드디어 캠핑날. 아이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정문에서 태우고 출발. 기대반 걱정반에 차를 모는 내내 두근두근. 두 시간이 후딱 지나 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써 와 계셨다. 아이들은 할머니와 근처로 놀러 갔다. 나는 아버지와 장비를 세팅했다. 차에서 의자 내리고 잠자리 정리하고 도킹텐트 치고 테이블 세팅하고 불 피우고 식사를 준비했다. 아버지와 둘이 한 덕에 별 탈 없이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곧 아이들이 돌아왔고, 다같이 저녁을 먹었다. 뭐니뭐니해도 고기는 숯불에 구워야 제맛이다. 이거슨 진리다. 언제 먹어도 맛있다. 다 같이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셨다. 아이들은 조금 놀다가 춥다며 자러 들어갔다. 나 혼자 남았다.
차에서 떼어낸 의자에 앉았다.
비어있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화로대엔 아직 불이 남아 있었다.
장작을 몇 개 넣고 부채질하니,
곧이어 불길이 살아 올랐다.
먹다 남은 고기를 다시 구웠다.
홀짝 홀짝 따라놓은 술을 마셨다.
취기에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았다.
따뜻함. 편안함. 나른함. 몽롱함.
지난 불멍 느낌이 다시 나왔다.
이 느낌, 어디서 오는 것이냐?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 것이냐?
반갑다, 이 느낌.
너를 만나려고 긴긴 겨울을 준비했다.
한참동안 불멍과 만남의 시간을 즐겼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장작은 다 떨어지고 숯불도 사그러들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이산가족마냥 짧은 만남이 아쉬웠지만,,, 너무 추웠다. 이제 들어가서 자자. 전기 장판 덕에 이불 속은 따뜻했다.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추워서 잠이 깼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전기 장판 스위치는 켜져 있었지만 온기는 전혀 없었다. 두꺼비집이 내려가 전기가 차단된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곤하게 자고 있었다. 밖을 나가보니, 다른 사람들도 두리번 거리고 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뭘 해야 할 지 몰라, 일단 차로 돌아왔다. 추위를 녹일 요량으로 차의 시동을 켜고 히터를 돌렸다. 한참을 지나니 조금 온기가 돌았다. 마냥 시동을 켜 놓을 수는 없었기에 시동을 끄고 다시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 잠이 깼다. 새벽에 춥게 자서 몸은 찌뿌둥 했지만, 차가운 아침 공기에 정신은 맑았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찬 수돗물에 밤새 쌓인 설거지를 했다. 아이들도 곧 일어났다. 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바로 옆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길래 다같이 산책을 했다. 큰 딸아이가 환호성을 질렀다. 돌을 하나 주웠는데, 수정이 박힌 돌이었다. 오, 놀라워라. 나도 나름 시골에서 컸지만, 수정을 직접 주운 적은 없었는데. 이거 운이 좋은걸. 그때부터 돌수집은 큰 아이의 취미가 되었다.
한참 돌줍기를 하다가 돌아왔다. 풀었던 짐을 다시 싸고 철수. 추운 날씨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불멍도 즐기고, 수정도 줍고, 좋은 추억을 새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캠핑 장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니멀 캠핑
첫 캠핑을 무사히 마쳤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일단 경험을 해 보면 더 이상 어렵지 않다. 캠핑의 재미와 불멍의 감동은 나를 캠핑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캠핑을 갔다. 출장을 나가 있는 동안에는 가지 못했다. 한겨울에는 추워서 못갔다. 한여름에는 붐벼서 못갔다. 그 외에는 매주 갔다.
자주 캠핑을 가다 보니 이것 저것 장비 욕심이 생겼다. 최대한 안산다고 했는데도 서서히 짐이 늘었다. 아이들과 나만 캠핑을 가다 보니, 텐트 치고 걷고, 짐 풀고 싸고, 식사 준비 설거지, 전부 다 내 몫이었다. 처음에야 재미로 했는데, 그것도 한 두번이지. 날씨가 점점 더워지니 도저히 힘들어서 혼자서는 못해먹을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미니멀로 가게 되었다. 안쓰는 장비는 중고로 팔아서 캠핑 경비에 보탰다.
아이들에게 설거지 하는 방법부터 가르쳐 주었다. 몇 번 가르쳐 준 다음에는 설거지는 완전히 아이들에게 맡겼다. 잠자리를 만들고 걷는 일도 아이들 몫이었다.
식사는 무조건 라면으로 해결했다. 햇반도 귀찮고, 반찬 싸가기도 귀찮았다. 나중에는 끓이는 라면도 귀찮아서, 컵라면에 김치만 가지고 갔다. 라면도 지겨우면 근처 식당에 가서 먹었다. 먹는 짐과 요리하는 짐이 확 줄고, 요리에 쓰는 시간도 줄었다. 식기라고는 고기 먹을 때 쓸 가위, 집게, 앞접시, 소스접시, 젓가락, 컵만 있으면 된다. 그 외에, 개인별로 쟁반을 하나씩 준비하면 깨끗하게 먹을 수 있다.
테이블은 짐을 담는 플라스틱 박스나 장바구니 위에 쟁반을 얹어서 사용했다. 하나 더 필요해져서, 쟁반에 상다리를 붙여 만들었다.
먹는 짐도 별로 없고, 다른 짐도 별로 없다. 차박을 하니 텐트도 필요 없고, 작은 헥사타프 하나 치는 것이 고작이다. 캠핑장에 도착해서 타프치고 짐을 푸는데 30분도 안걸린다. 다음날 돌아가려고 정리하고 짐 싸는데, 나 혼자 슬슬 해도 한시간이면 족하다.
자작 캠핑
냄비든, 의자든, 테이블이든, 앞에 “캠핑”자만 붙으면 비싸진다. 보통 물건보다 작고 가볍게 만들었다는 이유다. 옛날처럼 배낭에 짐을 싸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 차에 싣고 다니는데, 작고 가벼운게 무슨 장점인가. 어차피 밖에서 가끔 쓰는 물건인데, 좋은거 써서 뭐하나. 나, 공대 나온 남자다. 만들 수 있는 것은 만들어서 쓴다. 허접해 보이지만, 기능은 충실하다. 오히려, 웬만한 장비보다 좋을껄.
식기 건조대는 털실과 석쇠로 만들었다. 몇 번 잘 썼다. 어느날, 깜빡하고 석쇠를 집에 놓고 왔다. 캠핑에서 고기를 안먹을 수는 없었기에, 식기 건조대를 잘라 석쇠를 꺼내 썼다. 식기 건조대는 그 날 운명을 마감했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캠핑장에 도착했는데 바람이 너무 세서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 때 비닐 봉지가 바람에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비닐 봉지에 줄을 묶어서 가지고 놀까 생각했는데, 큰 아이가 연을 만들겠다고 했다. 연은 가벼워야 되서 종이랑 대나무로 만드는 건데. 게다가 우리는 연실도 없잖아. 이게 될까 반신반의 하고 있는데, 큰 아이는 이미 재료를 모아 조립을 하고 있었다. 비닐봉지를 잘라 넓게 폈다. 가벼운 폴대와 잠자리채 막대기를 뼈대로 삼아 청테이프로 붙였다. 텐트 로프를 여러개 이어 연줄을 만들었다. 실제로 날려 봤더니, 세상에나, 잘 난다. 강한 바람에 오히려 튼튼한 연이 잘 버텨주었다. 창의성이 고정관념을 깨버린 순간이었다. 아이들의 창의력이 대단함을 알았다. 그동안 많이 컸구나. 어른보다 낫네.
하루는 바닷가에 캠핑을 갔다. 밤이 되자 심심해졌다. 아이들과 얕은 곳에서 해루질을 하자고 했다. 터지고 남은 폭죽 대와 포크를 이어 작살을 만들었다. 물론, 물고기는 한 마리도 못잡았다.
또 다른 어느날, 캠핑장에 밤에 도착했다. 부지런히 짐을 푸는데 작은 아이가 심심하다고 보챈다. 나는 텐트 치랴 짐 풀랴 할 일이 많아서 무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작은 아이가 비닐 봉지에 바람을 넣어 샌드백을 만들어서 나무에 걸고 놀고 있었다. 스스로 노는 법을 터득했구나.
아이스박스는 따로 사지 않고, 택배에 사용된 스티로폼 박스를 썼다. 해먹은 안쓰는 커텐에 튼튼한 끈을 매달아 만들었다. 한 번은 깜빡 잊고 냄비를 안가져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스텐 그릇에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다. 불 위에 고기를 얹고 깡통으로 덮어두면 훌륭한 바베큐가 만들어진다.
사실, 위 바베큐 사진은 콘셉트 사진으로, 저렇게 하면 고기가 다 타버린다. 제대로 한 것은 사진을 못 찍었다. 제대로 하려면 숯을 한쪽으로 몰고, 고기는 숯 반대편에 두고, 화로대와 같은 크기의 깡통을 덮어야 된다. 고기 두께, 숯의 양 조절, 시간 조절에 노하우가 좀 필요하다.
의외로 쓸모 없었던 물건
인터넷을 찾아보면 수많은 캠핑 후기나 장비 리뷰가 있다. 나도 그런 리뷰를 보면서 어떤 캠핑 장비가 있는지 찾아보고 구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뷰에 혹해서 산 장비는 대부분 쓸모가 없었다. 어떤 것은 쓸 일이 없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내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모기장
차박 캠핑 후기를 보다가 차창에 모기장을 붙였다는 말을 들었다. 자석으로 붙이면 깔끔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다이소에서 5000원을 주고 모기장을 샀다. 하지만 한번도 쓴 일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캠핑을 가서 모기가 많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충매트
서너번 써 보았는데, 공기를 넣고 빼는 작업이 힘들고 귀찮았다. 잘 쓰는 사람은 5분도 안걸린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그마저도 귀찮았다. 더운 날 자충매트에 바람을 넣고 나면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핑 돈다. 아, 운동 부족인가? 철수하려고 바람을 뺄 때도 땀좀 빼야 하고, 조금만 삐끗하면 도로 부피가 커지기 일쑤다. 반면에 발포매트는 부피는 크지만 그냥 펴서 깔기만 하면 되니 훨씬 빠르고 편했다. 울퉁불퉁한 차 짐칸을 메우기에도 발포매트가 더 좋았다. 모양에 맞게 잘라서 깔면 되니까.
엑스그릴
개인적으로 화로대에 관심이 많아 인터넷으로 많은 화로대를 알아봤다. 그 중에서 페인트통의 장점에 부피까지 작은 화로대라고 생각해 구입했었다. 접었을 때 부피는 작은데, 페인트통의 장점을 따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한 번 쓰고 중고로 팔았다.
종이컵, 종이접시
설거지 하기가 귀찮아 한 번 쓰고 버리면 된다는 생각에 샀었는데,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가 버려서 불편하다.
롤테이블
돌돌 말면 부피가 작아지고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어 무게도 가볍다는 장점이 있는데, 펴고 접기가 귀찮다. 싼걸 사서 그랬는지 툭하면 상판이 떨어져 나가기 일쑤라서 암걸리는 줄 알았다. 좋은 품질의 것은 비싸다. 접었을 때 부피도 생각보다 크다. 내가 쟁반으로 만든 테이블이 훨씬 낫다.
미니 우드 스토브
인터넷 리뷰를 보면 이것으로 요리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나왔는데, 그건 최적의 조건이 갖춰졌을 때의 이야기다. 펠릿 같이 최적화된 연료가 있으면 라면 한 그릇은 끓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냥 나뭇가지 몇 개 꺾어 넣으면 잠깐 타고 말아서 커피물도 못끓인다. 내 스타일에는 부루스타에 부탄가스가 딱이다.
의외로 쓸모 있었던 물건
반면에 한 번 써 보고 우와 이거 딱인데 하는 물건들도 있었다.
미니화로대
지금까지 써 본 화로대는 페인트통이 제일 좋았다. 두번째는 미니화로대였는데, 부피가 아주 작다는 것과 부루스타로 쉽게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게다가 값도 싸다.
다이소 스텐 쟁반
작은 쟁반 하나에 2000원. 개인별로 준비해서 식판으로 쓰면 딱이다. 고기 재울 때도 좋고.
침낭
처음에는 집에 있는 이불을 가지고 다녔는데, 부피가 너무 컸다. 개인별로 침낭을 사니 부피가 1/3로 줄었고 정리하기도 편했다.
해먹
어느날 우연히 해먹끈 두 개를 주웠다. 아마 전날 왔던 사람이 깜빡하고 두고 간 모양이었다. 안쓰는 커텐 양 끝에 해먹끈을 달았더니 멋진 해먹이 되었다. 캠핑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나무에 해먹을 건다. 아이들은 해먹이라면 하루 종일 논다.
캠핑을 접다
4년 동안 캠핑을 다녔다.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 없는 법. 아이들도 같이 크면서, 학원때문에 더 이상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큰 아이나 작은 아이나, 이제는 아빠와 노는 것 보다 친구나 혼자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이제 캠핑은 가지 않는다.
캠핑 장비를 사는데 총 130만원 정도 들었다. 중간에 안쓰는 장비를 중고로 팔아서 30만원 정도 받았다. 100만원을 들여 4년 동안 잘도 놀러 다녔다.
요즘 소위 갬성캠핑이 유행이다. 단순히 놀다 오는게 아니라 휴식과 힐링까지 받고 올 목적일 것이다. 물건 앞에 캠핑 자가 붙으면 가격이 뛰고, 감성 자가 더 붙으면 더 뛴다. 내 성격상, 비싼 물건을 쓰면 기스갈까 망가질까 더 불안하다. 멋진 물건 감상은 그 때 뿐이다. 재밌게 놀고 푹 쉬다 보면 힐링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캠핑 스타일은 미니멀 캠핑, 자작 캠핑 이었다. 큰 돈은 들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재미있게 놀았다. 휴식과 힐링은 저절로 따라왔다. 이만 하면, 저렴하게 즐긴 취미 아닌가.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