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당불내증.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병(?)이다. 거창하게 병까지는 아니고, 우유를 먹으면 설사를 하게 된다. 평생을 살면서 내가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것을 몇 년 전에야 알았다. 그 이후로는 우유는 물론 아이스크림, 카페라테 등 우유가 들어 있는 음식도 절대 먹지 않는다.
그러다가 요거트는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 먹는 요거트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단맛이 너무 강하다. 마침 집에 있는 냉장고에 요거트와 우유가 있길래 한 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집에서 요거트 만드는 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대부분 "이러 이렇게 해서 요거트 만들기에 성공했어요~~ 참 쉽죠?" 식의 글이었다. 난 이런 글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데, 하라는 대로 따라 했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요리는 디테일이나 타이밍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그렇다.
요거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딱 두 가지다. 우유와 요거트. 만들어지는 조건도 딱 두 가지다. 온도와 시간. 그래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요리라 디테일과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세 번만에 성공했다.
요거트 만들기의 원리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전에 배경 지식과 실행 계획을 세워야 성공 확률이 늘어난다. 먼저 요거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유산균은 먹이와 적당한 온도가 있으면 증식하고 발효한다. 유산균의 주 먹이는 우유에 있는 유당이다. 유산균을 우유에 섞고 적당한 온도를 일정 시간 유지시켜주면 유당을 분해하여 젖산을 만들고, 이것이 요거트이다. 유당이 있어야 하므로 두유같은 식물성 우유나 저지방 우유로도 만들 수 있지만 락토프리 우유로는 만들 수 없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발효에 가장 좋은 온도는 37℃라는 설과 43℃라는 설이 있고 유산균이 죽는 온도는 50℃ 설과 60℃ 설이 있다. 온도가 실온 정도로 낮으면 활동이 둔화된다.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 죽겠지. 아마도 프로요(얼린 요거트)로는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발효에 필요한 시간도 글마다 다른데, 대략 서너 시간 정도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고, 12시간 정도 되면 완전히 되는 것 같다. 아마 유산균의 양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중에서 파는 요거트류 제품에는 유산균이 들어있다. (마시는) 불가리스류나 (떠먹는) 요플레류의 제품들이다. 겉에 작은 글씨로 "농후발효유"라고 쓰여 있는 제품에는 더 많이 들어있다. 야쿠르트류나 쿨피스류의 제품에는 들어있지 않다.
정리를 해 보면, 요거트류 제품과 우유를 섞어 대략 40℃ 전후의 온도를 4~12시간 정도 유지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상온으로 내려가는 것은 괜찮다. 유산균의 활동이 둔화되는 것이므로 다시 온도를 살짝 올려주면 된다. 하지만 50℃ 이상으로 올라가면 안된다. 유산균이 죽어 버리니까.
온도/시간 조건의 구현 방법
시중에서는 요거트 만드는 기계나 요거트 기능이 있는 밥통을 판다. 그런 제품이 있다면 온도와 시간 조건을 맞추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그런 제품이 없다. 어떻게 온도/시간 조건을 구현할 것인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원리는 다들 비슷하다. (1) 우유를 가열하여 온도를 40℃ 초반까지 올리고 (2) 천천히 식게 둔 다음 (3) 30℃ 후반으로 떨어지면 다시 가열하여 온도를 40℃ 초반까지 올린다. (1)~(3)을 반복한다.
전자렌지 이용법
(1) 전자렌지를 돌려 우유의 온도를 적당히 올린다. (2) 전자렌지 안에서 천천히 식게 내버려 둔다. (3) 온도가 너무 내려갔다 싶으면 전자렌지를 다시 돌린다.
밥통 이용법
(1) 밥통을 보온으로 두어 우유의 온도를 올린다. (2) 밥통을 끄면 밥통 자체에 단열재가 내장되어 있으므로 온도가 천천히 내려간다. (3) 온도가 너무 내려갔다 싶으면 다시 보온으로 둔다.
오븐 이용법
(1) 살짝 예열한 오븐에 우유를 둔다. (2) 오븐의 조명을 켜 두어 온도를 유지시킨다. (3) 온도가 너무 내려갔다 싶으면 오븐을 다시 예열한다.
냄비에 중탕
(1) 우유를 중탕하여 온도를 높힌다. (2) 수건 등으로 냄비를 감싸서 천천히 식게 내버려 둔다. (3) 온도가 너무 내려갔다 싶으면 다시 중탕한다.
여름날 차 안
(1) 여름 낮에 차 안에 둔다. (2) 적당히 창문을 열고 닫아 온도를 조절한다. (3) 온도가 너무 내려갔다 싶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다.
밥통으로 시도 - 절반의 성공
이 중에서 밥통이 제일 간단해 보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두 번 시도했고 두 번 다 실패했다. 아니, 절반의 성공이라 봐야 할 것이다. 요거트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너무 묽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은 온도 조절일 것이다. 밥통이 단열재로 감싸져 있기 때문에 외부를 만져보는 것으로는 우유의 온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온을 켜고 끄는 타이밍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 나온 대로 1시간동안 보온, 10시간 방치를 했을 때는 아주 묽은 결과가 나왔다. 약간 응용하여 중간에 잠깐씩 보온을 켰다 껐다 했을 때는 약간 더 되직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묽었다.
인터넷 글에서는 밥통이 제일 쉽다고 했는데, 아마 고수의 입장에서 그런 것 같다. 나같은 하수에게는 어려운 방식이다.
중탕 - 성공
다음으로 중탕을 시도해 보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성공이었다. 내가 한 디테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겠다.
재료는 아래와 같이 준비했다. 요거트 두 개, 우유 1리터, 컵 세 개. 요거트는 "농후발효유"라고 쓰여 있는 제품을 사용했다. 우유는 마트에서 파는 제일 싼 우유이다.
컵은 뜨거운 물을 넣고 헹궈 주었다. 혹시라도 남아있을 세균을 죽이기 위해서이다. 유산균이 잘 증식할 수 있는 조건은 세균도 잘 증식할 수 있는 조건이니까.
다른 글을 보면 우유랑 요거트를 실온에 1시간 정도 놔두라고 하는데,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본다. 어차피 가열해서 온도를 높여 줄 것이니까.
요거트를 우유에 넣고 휘저어 잘 섞어 주었다. 그리고 컵에 따랐다. 컵 용량의 95% 정도를 채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물이 튀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뚜껑을 덮거나 랩을 씌웠다.
큰 솥에 컵을 넣었다. 컵 세 개가 솥 안에 안 들어가서, 하나는 작은 컵으로 바꾸었다. 작은 컵 아래에 적당한 식기를 놓아서 세 컵의 높이를 맞추었다. 컵 높이보다 1~2cm 정도 낮은 정도로 물을 채웠다.
이제 적당히 가열하여 온도를 높여야 한다. 목표는 우유를 45℃로 만드는 것이다. 물을 45℃보다 뜨겁게 데우면 물의 열이 우유로 전달되면서 우유의 온도가 45℃로 맞춰질 것이다. 그러려면, 물을 몇도로 만들면 될까? 나, 공대 나온 남자다. 간단히 계산을 해 보자.
먼저 컵, 냄비, 주변 온도 등의 변수는 무시하고 물과 우유만 고려하면 아래와 같은 식을 만들 수 있다.
열량 변화 = 비열 x 질량 x 온도변화
우유가 얻을 열량 = 우유의 비열 x 우유의 질량 x 우유의 온도 변화
물이 잃을 열량 = 물의 비열 x 물의 질량 x 물의 온도 변화
우유가 얻을 열량 = 물이 잃을 열량
우유의 비열 x 우유의 질량 x 우유의 온도 변화 = 물의 비열 x 물의 질량 x 물의 온도 변화
물의 비열과 밀도는 1이다. 우유의 성분은 대부분 물이므로 우유의 비열과 밀도도 물과 똑같이 1이라고 가정하자. 밀도가 1이므로 부피와 질량은 같다 (1L = 1kg). 그러므로, 위 식은 아래와 같이 간단해진다.
우유의 부피 x 우유의 온도 변화 = 물의 부피 x 물의 온도 변화
우유와 요거트를 냉장고에서 방금 꺼냈으므로, 둘 다 대충 10℃ 정도 될 것이다. 두 개를 섞은 우유의 부피는 1.2L 정도이다. 솥 안의 눈금을 보니 물의 부피는 2.5L였다. 우리의 목표는 우유의 온도를 45℃ 정도로 맞추는 것이다.
우유의 부피 x (45℃ - 우유의 현재 온도) = 물의 부피 x (따뜻한 물의 온도 - 45℃)
우리가 구하려는 것은 따뜻한 물의 온도이다. 이것을 x라고 하고 나머지 숫자를 대입해 보자.
1.2 x (45 - 10) = 2.5 x (x - 45)
x = (1.2 x (45 - 10)) / 2.5 + 45
x = 61.8℃
물을 61.8℃, 대충 60℃까지 가열하면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역시 난 천재다.
그런데, 나는 물에 꽂을 수 있는 온도계가 없다. 물 온도가 60℃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지??? 이럴 때는 단순 무식하게 해결한다. 물에 손을 넣어 보는 것이다.
목욕탕 열탕의 물의 온도는 대략 42~44℃ 정도이다. 이 정도 온도에서는 10분도 넘게 버틸 수 있다. 60℃ 정도의 물이라면? 몇 초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혼자 가정했다. 그래서 수시로 손을 넣어 보며 온도를 쟀다. 대충 이때다 싶을 때 불을 껐다. 아마 3분 정도 데웠을 것이다.
과학 수학을 동원해서 계산을 했지만, 온도는 주먹구구 식으로 쟀다. 가스 불을 끄고 가만 생각을 해 보니 갑자기 너무 데운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너무 데워지면 유산균이 죽어버릴 테니까. 그래서 찬물을 두 컵 부었다. 차라리 적게 데워지는 것이 더 안전할 테니까.
데워진 냄비를 뚜껑을 덮고 햇볕이 드는 창가에 놓았다. 물이 식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였다. 유산균은 직사광선을 싫어하므로 뚜껑은 꼭 덮어야 한다.
그 날은 기온이 32℃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날이었다. 샤오미 온도계를 뚜껑 위에 올려보니 온도가 39℃까지 올라갔다. 이 온도는 냄비 뚜껑의 온도이지 물의 온도가 아니다. 물의 온도는 아마 더 뜨거울 것이다. 다만 기온은 32℃이지만 햇볕 덕분에 물이 식어도 39℃ 정도는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면 한동안 아주 적당한 온도로 유지될 것이다.
서너 시간 지나 저녁이 가까워졌다. 냄비를 두었던 남동향 창문에서 햇볕이 사라지고 물도 식었다.
다시 냄비를 데워야 한다. 처음 데울 때는 우유가 차가운 상태였으므로 냄비의 물을 60℃까지 올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유 온도가 물과 같을 테니 물을 조금만 데우면 된다. 얼마나 데우면 될까?
아까의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어, 이번에는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무리 온도를 계산해 봐야 물의 온도를 잴 수 없으니 소용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대충 1분 정도 데우고 불을 껐다.
이제는 햇볕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수건 세 장으로 냄비를 덮어서 열의 손실을 최대한 막았다. 수건 아래에는 샤오미 온도계를 두었다. 온도계가 물에 접촉하고 있지는 않지만 단열재 역할을 하는 수건과 온도를 잘 전달하는 냄비 사이에 있으므로 물의 온도에 가까운 온도가 측정될 것이다.
한참을 지나 수건을 걷고 온도계를 보았다. 47.7℃이다. 이런. 너무 높은 온도다. 데우기를 너무 대충 한 것 같다. 뚜껑을 열고 한동안 두어 물을 식혔다. 다시 뚜껑을 덮고 수건을 감쌌다. 불안한 마음에 수시로 온도계를 체크했다. 다행히 온도는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실내 온도는 29℃. 물은 비중이 큰 물질인데다 수건이 단열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식을 때까지 서너 시간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요거트가 다 만들어질 것이다.
수건을 덮은지 대여섯 시간이 지났다. 냄비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하찮아 보이던 수건의 단열효과가 생각보다 좋았다. 요거트를 만들기 시작한 후 총 10시간 정도 지난 셈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요거트가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냄비 뚜껑을 열고 컵을 꺼냈다. 시큼한 냄새, 탱탱한 질감의 요거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컵을 꺼내어 냉장고로 옮겼다. 굳히기 위해서이다.
다음날 아침 냉장고에서 요거트를 꺼냈다. 옆으로 기울여도 전혀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잘 굳어져 있었다. 숟가락으로 떠도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질감이나 말랑말랑한 정도는 순두부와 비슷했다. 맛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았다. 이만하면 대성공이다.
결론
밥통 방법은 실패했지만 중탕은 한번에 성공했다. 중탕의 장점은 대충이나마 온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과 물의 비열이 크기 때문에 온도가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물에 꽂을 수 있는 온도계가 있었으면 좀 더 쉬웠을 것이다.
초짜가 좌충우돌 만들어본 요거트. 만드는 내내 실패할까봐 노심초사 조마조마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수식으로 온도를 계산하고 샤오미 온도계까지 동원해서야 겨우 만들 수 있었으니, 내게는 거의 프로젝트 급의 일이었다.
"그까이 꺼~ 대~충~" 하면서 뚝딱뚝딱 쉽게 만드는 고수가 보면 웃긴 글일 테다. 빨리 여기서 끝내야겠다. ^^
덧붙이는 말.
유산균이 쇠에 닿으면 죽는다는 설이 있는데, 근거 없는 말이다. 쇠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아무 지장 없다. 꿀도 마찬가지다. 쇠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되고, 심지어 스텐 용기에 담아 보관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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