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화장실의 형광등을 LED로 교체했다. LED의 장점인 긴 수명답게, 언제 교체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몇 년 동안 사용했다.
한 가지 작은 문제점이 있었는데, 아주 가끔씩 LED 등이 깜빡거린다는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잘 켜지고 불편함이 없었다. 어떨 때는 몇 달 동안 잘 켜졌다. 그런데 어떨 때는 등을 켜면 1초 주기로 꺼졌다 켜졌다하는 깜빡임 현상이 나타났다. 한 번 깜빡거리기 시작하면 껐다가 다시 켜도 깜빡였다. 그러다 몇 시간 지나고 다시 켜면 깜빡임 없이 잘 켜졌다. 이런 현상은 아주 까끔씩 발생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참고 살 만한 정도의 불편함이었다.
깜빡임의 원인이 무엇일까? 내 가설은 열팽창/수축에 의한 접촉 불량이었다.
- 전선이 약간 팽팽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 집안의 온도나 습도 변화에 의해 전선의 길이가 약간씩 늘었다 줄었다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 이 때문에 스위치와 전선의 접촉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근거가 있는 가설은 아니었다. 가설을 증명할 필요도 못 느꼈다. 참고 살 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몇 년을 살았다.
2024년 여름은 정말 더웠다. 열대야가 한 달 넘게 지속되었다. LED 등의 깜빡임 현상도 자주 발생했다. 어, 잠깐만... 왜 요즘 들어 LED 등이 자주 깜빡이지? 혹시 더위와 깜빡임이 연관이 있나? 진짜 열팽창 가설이 맞는 건가? 나, 공대 나온 남자다. 좀 더 따져 보기로 했다.
콘크리트의 열팽창 계수는 1.0 x 10-5 / ℃ 이다. 1m 길이 콘크리트의 온도가 1℃ 올라가면 길이가 0.01mm 늘어난다. 구리의 열팽창 계수는 1.65 × 10-5/℃이다. 1m 길이 구리선의 온도가 1℃ 올라가면 길이가 0.017mm 늘어난다. 온도가 올라가면 구리의 길이가 더 많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온도가 올라가면 접촉이 더 잘 될 것이다. 아무래도 열팽창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 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뭘까? 다른 가설을 생각해 냈다. 일명, 저전력 가설.
- 더운 여름철이라 사람들이 에어컨을 많이 켠다.
- 그래서 평소보다 전력이 떨어진다.
- 전력이 LED 등에도 살짝 모자라게 공급된다.
아주 그럴 듯한 가설이었다.
LED 등은 형광등용 안정기에 연결되어 있다. 형광등용 안정기와 LED 등의 용량을 비교해 보면 가설이 맞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화장실 등을 뜯었다.
원래는 FPL 타입의 형광등을 두 개 달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런데 LED 등은 하나만 달아도 밝았기 때문에 오른쪽은 비워두고 있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LED 등이다. 안정기는 두 개가 달려있다. 형광등용 안정기이지만, LED 등에도 사용할 수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형광등 안정기에서도 동작 가능하도록 LED 등이 나온다.
위는 안정기의 사진이다. 대부분의 안정기는 몇 와트 용량인지 씌어 있다. 그런데, 화장실의 안정기는 입력 전력은 있는데, 출력이 몇 와트인지는 씌어 있지 않았다. 정격 2차 전압과 전류는 각각 87V와 0.34A라고 나와 있다. Watt는 전압 곱하기 전류이다. 그러므로, 추측컨대 이 안정기는 최대 출력 29.58W짜리 안정기일 것이다. 이상한 점은, 입력 전력이 22W라는 것이다. 입력보다 출력이 높은 이상한 안정기네. 물리 법칙을 넘어서는 노벨상감 안정기이거나, 틀린 스펙을 표기했거나, 둘 중 하나이다. (당연히 후자이다.)
위는 LED 등의 사진이다. 여기에는 몇 와트인지가 두 개가 씌여 있다. 램프전력: 18W, 종류(구분) 36W. 이 중에서, 36W라고 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량이다.
안정기의 용량은 LED 등의 용량보다 커야 한다. 그런데, 안정기 용량은 29.58W이고 LED 등은 36W이므로, 안정기 용량이 LED 등의 용량보다 적다. 보통 전자 제품을 만들 때는 표기된 용량보다 약간의 여유를 두고 만든다. 그래서, LED 등은 29.58W의 낮은 전력에서도 간신히 동작은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에어컨을 많이 사용하는 등의 이유로 전력이 약간 떨어지면 안정기의 출력도 약간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LED 등이 깜빡였던 것이다. 숫자에 의해 저전력 가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보통 FPL 타입의 형광등은 36W 짜리가 많다. 따라서, 우리 집 화장실의 안정기는 적어도 36W 이상의 출력을 내는 것이 달려 있어야 맞다. 저용량의 안정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아파트 건설사에서 싸구려 안정기를 달아 놓은 모양이다. 분양받아 입주한지 13년 만에 발견한 사실이다.
깜빡임 현상을 고치려면 안정기를 더 큰 용량으로 바꾸거나, LED 등을 작은 용량으로 바꾸어야 한다. 문제의 원인은 안정기 용량이 적은 것이므로, 더 큰 용량의 안정기로 바꾸는 것이 맞는 해결책이다. 안정기를 교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난 공대 나온 남자니까. 다만 시간과 약간의 돈을 써야 하는 귀찮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집안을 뒤져 보다가 LED 등을 하나 더 찾아냈다. 이것도 FPL 36W 대체용 LED 등으로, 지금 달려있는 LED 등과 같은 용량이었다. 혹시나 해서, LED 등을 이것으로 바꿔 보았다. 그랬더니, 깜빡임 문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용량은 예전 것과 같지만, 나중 것은 저전력 상황에서도 더 잘 버티도록 만들어져 있나 보다.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문제는 사라졌다. 보통 LED 등의 수명은 보통 10년 이상이므로, 앞으로 10년 동안은 깜빡임 걱정 없이 살 것이다. 10년 뒤에 등을 교체하면 다시 깜빡임 문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문제는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하면 될 것으로, 지금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만... 또 다른 가설이 생각났다. 일명, 수명 가설.
- 예전 LED 등은 초창기에 나온 것이라서 (또는 저가라서) 생각보다 수명이 길지 않은 제품이다.
- 예전 LED 등의 수명이 거의 다 했다. 그래서 가끔씩 깜빡였다.
- 새 LED 등으로 교체하니 깜빡이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이 가설도 설득력이 있네. 저전력 가설이 맞는지 수명 가설이 맞는지, 지금은 결론을 내지 못하겠다. 어쨌든 문제는 사라졌으니, 결론을 낼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냥 이대로 계속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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