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냉장고에 밤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 회사 카페 메뉴에 밤라떼가 생긴 이후부터였다. 밤라떼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인기가 좋았다. 먹어보니 따뜻한 바밤바 맛이다. ‘오… 집에서 애들한테 해 주면 좋아하겠는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만드는 법도 간단했다. 삶은 밤 몇 알과 우유와 꿀을 넣고 믹서에 갈면 끝.
고향 산소 옆에는 밤나무가 몇 그루 있다. 처가 산소 옆에도 밤나무가 많다.
몇 년 전, 추석에 내려가서 차례지내고 남은 생밤이 있길래, 밤라떼를 만들려고 조금 얻어왔다. 삶아서 껍데기 까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아이들에게 밤라떼를 만들어 주었다. 엄청 맛있어 했다. 며칠만에 다 먹어 버렸다. 본가와 처가에 아이들이 밤을 맛있게 다 먹었다고 전했다. 그 다음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본가와 처가에서 밤을 한 자루씩 받아왔다.
밤은 맛있기는 하지만 껍질을 까는 것이 고역이다. 시장에 가면 밤껍데기 까는 기계가 있다. 가게에서 밤을 사면 약간의 웃돈을 받고 밤을 까준다. 하지만 그건 그 가게에서 밤을 살 때 일이다. 우리처럼 직접 수확한 사람이 밤을 들고 가서 까 달라고 하면 돈을 더 받는다. 사는 값이나 거기서 거기다. 설날 추석 제사때마다 상에 올라가는 밤은 항상 내가 깠다. 지금까지 깐 밤을 일렬로 놓으면… 음… 하여간 엄청 깠다. 가게에 돈 주고 까느니, 차라리 내가 까고 만다.
밤은 상온에 그냥 두면 안된다. 겉보기엔 아무 이상 없어 보여도, 일주일만 지나면 밤벌레가 속을 파먹고 하얀 가루를 뱉기 시작한다. 조금 더 지나면 포동포동한 밤벌레가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져오자마자 무언가 조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시골에서 밤을 가져오면, 그날로 삶고 껍데기를 까서 냉동실에 보관했다. 나중에 밤라떼를 만들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 썼다. 만들고 먹을 때는 좋지만, 삶은 밤을 까는 일은 여전히 고역이다. 처음에는 할 만 했지만, 갈수록 귀찮은 일이 되었다. 추석 남은 음식 처리하는 것도 귀찮은데 밤까지 얹힌 꼴이다. 올해는 밤을 가져오자 마자 냉동실에 넣었다.
오늘 아침, 와이프가 냉동실을 열더니 으악 소리를 지른다. 쌓여 있던 음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린 것이다. 하나 둘 주워 다시 냉동실에 넣으려니 테트리스가 따로 없다. 빈 자리를 만들려고 여기 저기 살피다가 밤자루에서 눈이 멈췄다. 와이프가 먹지도 않는 거 버리겠단다. 순간적으로 아까운 마음과 귀찮은 마음이 싸웠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아까운 마음이 이겼다. “버리지 마. 내가 먹을꺼야.”
밤조림을 만들어 보다
몇 달 전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았었다. 밤조림을 만드는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겉껍질만 까고 속껍질은 까지 않고 밤조림을 만들었다. ‘아하, 밤조림은 속껍질을 안 까도 되는구나.’ 게다가 맛도 좋댄다. 그래, 이번에는 밤조림을 해 보자. 바로 인터넷에서 밤조림 만드는 법 검색을 시작했다.
밤조림 만드는 법 (인터넷 검색 결과)
1. 밤을 겉껍질만 벗긴다. 속껍질까지 벗기면 삶을 때 밤이 다 터진다고 한다. 잔털과 심까지 제거한다. 따뜻한 물에 밤을 하룻밤 담가주면 껍질 벗기기가 더 쉽다.
2. 겉껍질을 제거한 밤을 베이킹소다를 넣은 물에 하룻밤 담가준다.
3. 베이킹소다 물 그대로 20분 끓인다.
4. 탁해진 물을 버리고 찬 물로 밤을 헹군 다음 또 20분 끓인다. (두번째 끓이기)
5. 탁해진 물을 버리고 찬 물로 밤을 헹군 다음 또 20분 끓인다. (세번째 끓이기)
6. 찬 물로 헹군 밤에 설탕을 밤 무게의 반정도 넣고 물을 밤이 잠길 정도 넣고 졸인다.
7. 물이 반정도 줄면 간장과 럼을 약간 넣고 불을 끈다.
8. 식으면 병에 담아둔다. 1개월쯤 지나서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
밤까기
속껍질은 안까도, 겉껍질은 까야 한다. 겉껍질만 깐다 해도 고역은 고역이다. 물에 불려 놓으면 좀 쉽다고 하니, 일단 물에 담궈 두었다.
퇴근 후, 저녁때 집에 들어오자마자 밤을 까기 시작했다. 생밤을 깔 때는 밤까기 전용 가위를 쓰면 쉽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밤까는 가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과도를 쓰기로 했다.
물에 불려진 밤은 생각보다 잘 까졌다. 과도로도 충분히 잘 까졌다. 밤까는 가위를 쓸 때와 반대로, 뾰족한 부분부터 까니 더 잘 까졌다. 아래와 같이 뾰족한 부분부터 해서 넓은 쪽을 벗겨내고, 좁은 쪽을 살살 당기면 쉽다.
그런데, 어떤 놈은 너무 잘 까졌다. 칼 대고 힘 한 번 주니, 속껍질까지 홀라당 까졌다. ‘우 씨, 레시피에 속껍질은 까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런 일은 맨정신에 하기 힘들다. 맥주를 몇 잔 홀짝거리며, 점점 밤까기 삼매경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덧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드디어 다 깠다.
세시간동안 허리 펴고 어깨 펴고 가슴 펴고 바른 자세를 유지했더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과도를 잡았던 검지손가락이 부었다.
이제 베이킹소다를 탄 물에 하루 정도 담가둬야 한다. 그런데, 집에 베이킹소다가 없다. 지금 시간 10시 반. 집 앞 슈퍼에서 사와야겠다.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니 와이프가 한마디 한다. “오빠, 팝콘도. 카라멜 맛으로.” 하여간에, 이런 눈치는 빠르다.
집 앞 슈퍼. 생전 베이킹소다를 사 본 적이 없던 나는 직원의 도움을 받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딱 한 종류만 있었다. 이름은 베이킹식소다.이름에 “식”자가 왜 들어가 있을까? 이걸 사도 되나 왠지 꺼림직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냥 사왔다. 물론 팝콘도 같이.
깐 밤을 대야에 옮겨담고 베이킹소다 두 숟갈에 물을 넉넉히 담아 하루를 두었다.
잠깐, 베이킹소다에 대해서 알고 가자. 베이킹소다는 전문용어로 탄산수소나트륨(NaHCO3)이라고 한다. 베이킹소다를 가열하면 탄산나트륨, 물, 이산화탄소로 분해된다. 기체인 이산화탄소가 나오므로 당연히 부피가 커진다. 이 현상을 이용해서 빵반죽을 부풀리는 용도로 주로 사용한다. 식초와 섞으면 거품을 내면서 부풀어오른다. 뭔가 부글부글 하니까 세척용도로 사용하면 좋다는 소문이 있는데, 화학적으로는 근거가 없다. 세척용도 보다는 막힌 하수구를 뚫을 때 더 좋다. 부풀어 오르니까.
참고로, 베이킹소다에 이것 저것 섞은 것이 베이킹파우더이다.
밤삶기
다음날 저녁. 물에 담가둔 밤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물 색깔은 포도주로 변했고 위에는 거품이 둥둥. ‘이거 먹을 수 있기는 하는 건가?’ 불안하긴 했지만... 나, 공대 나온 남자다. 단순 무식 직진한다.
인터넷 레시피대로 베이킹소다 물 그대로 큰 냄비에 옮겨 담고 끓이기 시작했다. 20분 끓이랬으니 지금부터 30분 쯤 지나 불을 끄면 될 것이다. TV에 뭐 재밌는거 안나오나 채널을 돌리면서 곁눈으로는 수시로 냄비 상태를 체크했다.
끓기 시작한 지 조금 지났을까. 수상한 조짐이 보인다. 거품이 조금씩 두꺼워지고 울룩불룩 해진다. ‘저놈 왜 저래?’ 지켜보는 사이에 급기야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 ‘우씨, 레시피에 이런 말은 없었는데.’
잽싸게 가스 불을 껐다. 냄비는 분이 덜풀렸는지 한동안 거품을 뱉어냈다. 일단 밤은 찬 물에 식히고. 가스렌지를 보니 와이프에게 한소리 듣게 생겼다. 가스렌지가 식기를 기다렸다가 행주로 깨끗이 닦았다. ‘완전범죄 성공.’
일단 한시름 놨다. 다시 밤으로. 어제 까 놓았던 밤 중에는 깨끗이 속껍질만 남은 녀석도 있었지만, 아직 밤털이 남아있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런데, 베이킹소다 때문일까? 손가락으로 슬슬 문지르기만 해도 묵은때 벗겨지듯 밤털이 벗겨진다. 요 재미에 빠져 밤털 제거 작업. 한 10여분 걸린 것 같다.
냄비에 밤과 물을 넣고 끓이기 2차 시기. 맑은 물로 시작. 밤털을 전부 제거했으니 이젠 끓여도 깨끗하겠지. 그런데, 이게 웬걸. 끓기 시작하면서 다시 포도주 색깔로 변하는 물. 그나마 1차 시기처럼 거품이 넘치지는 않는다만, 저 물 색깔 어쩔.
거실에 있던 와이프가 냄새 민원을 제기한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용서해 주겠단다. 그제야 냄새를 맡아보니 나물 끓일 때와 한약 다릴 때 사이 어디 쯤의 냄새다. 나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나, 공대 나온 남자다. 중간에 포기는 없다. 끝까지 직진이다. 사실은 불안해 죽겠다.
불을 끄고 찬 물로 식혔다. 두 번을 끓였으니, 레시피대로라면 이제 설탕을 넣고 끓일 차례다. 그렇지만 물 색깔이 영 못미더웠다. 한 번만 더 끓여보자. 설마 또 포도주 물이 나오려나? 끓이기 2.5차 시기. 우려했던 대로, 이번에도 포도주 물에 나물 냄새. 좀 더 오래 끓여야 하는건가? 20분을 꽉 채우고 10분을 더 끓였다가 식혔다.
계속 끓이기만 반복할 수는 없다. 마지막 단계로 진입한다. 찬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설탕을 찾아내어 들이 부었다. 마지막으로 끓일 것이니 물도 정수기 물을 사용했다. 설탕을 찾다가 찾아낸 요리당과 먹다 남은 포도주도 부어 넣었다. 오. 럭셔리 밤조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끓이기 시작. 설탕때문인가? 물 색깔도 맑아 보이고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런데 좀처럼 물이 줄어들지를 않는다. ‘레시피에는 물이 반으로 줄면 불을 끄라고 되어 있었는데…’ 한참을 기다리다 마지못해 불을 껐다. 거품이 가라앉더니 물 양이 확 줄었다. ‘좀 더 일찍 껐어도 되는 거였네.’
미리 씻어 놓은 유리병에 국자로 밤을 넣었다. 아직 뜨거운 상태라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병에 넣으니 모양이 그럴 듯 한데?’ 하나 먹어보니 맛도 좋다. 속껍질 쓴맛이 날까 걱정했는데, 하나도 나지 않는다. 성공인가보다. 히힛.
이틀 걸려서 밤조림을 다 만들었다. 만들자 마자 먹어도 맛있는데, 한 두달 있다가 먹으면 더 맛있다니 기대된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우유 넣고 꿀 넣고 갈아서 밤라떼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나중에 알게된 것인데, 리틀포레스트에서도 밤을 끓인 물 색깔이 포도주 색깔이었다. 그리고, 병에 담을 때 설탕물을 가득 채웠다. 나는 다 졸아버려서 반 밖에 못채웠다.
인터넷에는 속껍질까지 다 까버리면 삶을 때 밤이 다 터져버린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터지지 않았다. 속껍질까지 다 까도 상관 없다는 이야기. 맛도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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